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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효현리 삼층석탑에서의 상념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14 14:23 수정 2007.05.14 02:26

달마대사-양무제-법흥왕-진흥왕-애공사지

효현리 삼층석탑에서의 상념
달마대사-양무제-법흥왕-진흥왕-애공사지

ⓒ 경주신문사

서천교를 지나 충효동을 통과하면서 경주대학교 가기 직전에 왼쪽으로 난 도로로 고개를 넘어가면 밝은 햇살에 확트인 전망이 나오고 큰 소나무에 가린 효현리 삼층석탑을 보게 된다. 보물 제67호 효현리 삼층석탑 안내문에는 탑이 서 있는 이곳은 1669년 경주부윤 민주면이 지은 동경잡기에 애공사지 라고 전한다고 되어 있다. 바로 이 한 구절의 내용이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의 정확한 위치 고증에 큰 혼란을 주곤 한다.

효현리 삼층 석탑을 갈 때마다 난 꼭 삼국사기 책을 들고 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23대 법흥왕과 24대 진흥왕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책을 펼쳐놓고 살펴보면 이 일명 애공사지라 불리는 효현리 삼층석탑에서 정확하게 서쪽으로 500미터 거리에 있는 고분을 현재 법흥왕릉으로, 동북동쪽으로 1천500여미터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이라고 현재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은 최소한 가까운 곳에 존재해야하고 평지가 아닌 작은 산봉우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두 왕릉의 남쪽에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이 애공사지 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추론하면 북쪽 산에 두 개 이상의 고분이 있고, 남쪽에 절 터가 있었음직한 곳은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 부근이 유력하다고 할 수가 있다.

효현리 삼층석탑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왕릉급 고분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효현리 삼층석탑 부근이 애공사지 라고 전한 동경잡기의 내용또한 신빙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역사기록의 진실 여부는 제쳐놓고 일명 애공사지로 불리는 효현리 석탑을 찾을 때마다 아직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애공사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 오르곤 한다. 애공사는 아마 법흥왕과 진흥왕 및 왕실가족과 밀접한 사찰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효현리 삼층석탑을 찾을 때마다 애공사지, 법흥왕릉, 진흥왕릉에 얽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떠 올리다가 고구려 백제에 비해 외래의 신종교에 배타적이던 신라가 왜 하필이면 법흥왕때에 불교를 공인하고 진흥왕 때 흥륜사준공, 황룡사 낙성등 갑자기 불교를 왕실차원에서 지원했을까하는 엉뚱한 상념을 품곤 했었는데, 최근에 중국을 몇 번 다녀오고 중국의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시대의 불교사를 읽다가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을 찾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8년, 15년에 중국 남조(송,제,양,진)의 양나라와 토산물 보내고 사신을 주고 받으며 중국에서 보내온 향의 용도를 몰라서 묵호자에게 물어보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진흥왕 10년에 양나라에 사진보냈고, 25년과 33년엔 중국북조 북제에 조공, 28년과 29년, 31년,32년에 남조 진나라에 토산물 보낸 기록이 있다.
남북조시대 북조는 북방 이민족이 한족을 강압하였고, 이를 피해 남조로 피난온 한족 귀족에 의해 남조는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양 무제는 북교를 숭상하고 쉼취하여 화려한 사찰을 많이 지었고, 특히 수도인 건강(지금의 중국 남경)에 대애경사 건립을 위해 사원에 엄청난 시주를 하였고, 불교전파를 위해 세 차례나 동태사에 사신의식을 거행하고, 그 때마다 관료들은 엄청난 돈을 사찰에 주고 황제를 궁으로 모셔와 국고를 낭비하여 불교가 기형적으로 번영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여 결국은 후경의 난에 양나라가 멸망했다.

아마 진흥왕이 말년에 머리를 깍고 스님 복색을 하고 자신이 법운 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지어 썼다는 기록을 정독해보면 아마 양나라와 사신 교환을 하면서 양 무제의 불교심취 소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양무제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중국선종의 초조로 추앙되는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에 오자말자 양무제와 선문답을 나누었는데, 양주제가 달마스님의 말뜻을 못알아 들음에 달마스님이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가버림을 후회하여 불교공부에 충실하고 심취하고 불교진흥을 시켰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신 교환을 통해 신라 법흥왕과 진흥왕에게 영향을 주어 신라불교가 발전하는 촉진제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떠 오른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의 효현리 삼층석탑(법흥왕대와는 300여년 뒤 9 세기의 것으로 추정)의 안내판 끝의 한 구절에 나오는 동경잡기와 애공사지란 말, 삼국사기, 법흥왕, 진흥왕 그리고 중국 양나라 무제와 달마대사 이야기, 신라불교의 진흥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문화재 산책의 묘미는 저무는 석양을 보면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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