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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삼국사기’에 묻노라-中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14 14:26 수정 2007.05.14 02:28

향가

향가

‘삼국사기’에 묻노라-中

ⓒ 경주신문사

녹음방초성화시(綠陰芳草盛花時)란 말이 참으로 다가온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매양 녹음뿐이요, 어디서 눈을 감아도 푸름뿐이다. 마음도 몸도 아니 꿈도 모두 푸르다. 이렇게 푸름이 활개를 치는 이즈음이 되면 벌써 탁족(濯足)이 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입하(立夏)가 어저께였고, 곧 소만(小滿)과 망종(亡種)이 다가오고 있다. 예로부터 소만은 모내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알토란 같이 자란 모를 넓은 무논으로 던지던 모습은 이젠 오래된 흑백 영사기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세상은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변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사이다. 어제의 삶은 이미 역사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고, 오늘도 시시각각 역사화 되어 가고 있다. 역사는 우리들의 삶의 거울이자, 표본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실을 담고 있는 생명체에 비유되곤 한다.

김부식 역시 대단한 문필가이면서 역사학자이다. 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역사서는 있었다. ‘구삼국사’ 등 여러 가지 역사서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식은 당대에 전해져 오던 역사서가‘글이 거치고 졸렬하고 사적의 유루가 많아’다시 편찬한다고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 밝히고 있다. 이‘진삼국사기표’에 재미있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소개한다.

오늘날 논문이 완성되면 책으로 엮어 스승이나 지인들에게 드린다. 이때 드리면서 하는 말이‘컵라면 뚜껑으로는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왕에게 올리면서 고하는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적어보면,‘바라오니 성상폐하께옵서 이 소루(疏漏)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작(妄作)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명산에 비장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병 뚜껑과 같은 무용(無用)의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김부식은 최대한 몸을 낮추어 겸손의 말로 왕께 아뢰었지만, 오늘날은 무용의 것을 유용(有用)으로 아예 바꾸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럼‘글이 거치고 졸렬하고’란 어떤 것을 말할까? 정말로 김부식 같은 고려말 대 문장가가 보기에 전해오던 사책이 그가 말한 것처럼 글 자체가 거치고 졸렬했을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국보로 엄중 보관되고 있지만 김부식이 고기(古記)라고 통칭한 사책은 단 한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그 편린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김부식은 방언을 이야기하면서는 항상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다. 남해 차차웅의 차차웅은 무(巫:무당)를 뜻한다고 한 것과 유리이사금의 이사금 역시 방언으로 임금을 뜻한다고 한 것, 눌지마립간의 마립간이 말뚝을 뜻하는 것 역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많이 인용한 김대문이 지은 저서 이름은 열전 설총전 말미에‘김대문의 본래 신라 귀족의 자제로, 성덕왕3년(704)에 한산주도독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 권을 지었으며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그 서책명만 간신히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때 김부식이 이 서책 중 어느 것이라도 ‘삼국사기’에 기록했다면 많은 부분의 역사가 오늘날 뒤바뀌었을 것이다.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대 문장가인 김부식이 질투를 해서일까?

ⓒ 경주신문사

사실 야사이긴 하지만 김부식은 자신보다 시를 잘 짓는 정지상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정지상을 서경파로 몰아서 묘청의 난 때 죽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야사집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야사는 어디까지나 흥미본위의 각색이 필수적으로 가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믿을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김부식이 정지상보다 시부분 만은 부족하였다고 하는 데에는 동의를 하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수집한 당대까지 남아 있던 사책을 모두 고기라고 지칭하면서 거의 무시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김대문의 저서들은 이름이나마 남아 있으니 매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화랑세기’를 일본에서 필사했다는 서책이 발견되어 역사학계는 물론 온 학계가 소금 만난 미꾸라지다. 진서든 위서든 일단 연구를 해보아야 할 가치는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자 및 강역연구자이며 또한 교육자로 살다 간 남당 박창화가 무엇 때문에 화랑들의 난삽한 전기인 ‘화랑세기’를 창작했을까? 김부식 당대에 남아 있었고 인용까지 한 서책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기록하였다면 오늘날 같은 진·위서 논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기자는 묻고 싶다. 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대의 가치관과 상이하다는 이유로 그 많은 서책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는지 정말로 묻고 싶다. 특히 주옥같은 천년의 노래 향가를 단 한 수라도 기록했다면 김부식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화랑도의 용맹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왜 그렇게 ‘삼국사기’에는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김부식에게 아니 남아 있는 ‘삼국사기’에게 묻고 싶다. 혹시 난삽한 화랑들의 이야기가 걸림돌이 되었지 않았을까? 그럼 ‘화랑세기’의 어떤 기록이 김부식을 손사래 치게 하였을까?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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