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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삼국사기’에 묻노라-下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20 11:54 수정 2007.05.20 11:57

향가

향가

‘삼국사기’에 묻노라-下

비가 잦다. 잦은 비에 안개 낀 강나루 먼발치에 정말 서러운 내님이 두리번 하는 흔적을 본다. 비온 뒤의 장미는 화사한 5월의 신부가 되어, 도도한 요염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이렇게 잦은 비님과 함께 도라산 기차는 임진강을 가로질러 고려 황업의 중심 개성으로 처녀의 하이얀 속살로 내달린다고 한다. 또한 개성 만월대 발굴에 남북한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고 한다. 혹시 이번 발굴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에 관한 서책이라도 한아름 발견됐음 하고 쓴웃음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 경주신문사

신라는 중앙황권이 제 모습을 갖춰가면서부터 족내혼이 일반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고종간은 물론 친 사촌, 심지어는 동복누이와도 결혼을 한 것이 사실인 것으로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금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머리를 좌우로 흔들게 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의 어머니 양명공주의 말을 들어보면 일견,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양명공주는 양도공에게 동복누나인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한다. 이에 양도공은 처음엔 뿌리치다가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이적·夷狄)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하고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도 이때까지도 신라는 황실은 물론 중앙귀족들에겐 족내혼이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당대 선진 국제 질서를 맛본 양도공으로써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부분을 김부식은 교묘하게 회피하는 듯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 유신의 나이 환갑에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딸인 지소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슬그머니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이 처음 결혼한 서라벌 색녀의 대명사 미실의 손녀 영모는 끝내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럼 여기서 미실에 대해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미실이란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화랑세기’에 온통 도배를 해 놓았을까? 미실이 색공(色供)을 바친 사람들을 적어보자. 첫째 24대 진흥대왕을 모셨다. 두 번째 진흥의 아들 동륜태자와 금륜태자(25대 진지왕)에게 색공을 바쳤다. 다음으로 동륜태자의 아들 26대 진평대제까지도 자신의 치맛자락으로 감싸며 황실을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진흥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손자까지도 미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된다. 지금의 가치기준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금수(禽獸)만도 못하다고 혀를 찰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가 아닐까? 아무리 부정을 해도 진실은 항상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당연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미실은 이뿐만 아니다. 자신의 사촌인 사다함과의 핑크빛 사랑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삼국유사’에 첫 국선(國仙)이라고 칭송한 설원랑과의 사통도 아주 자신 있게 자신의 주도로 즐기고 있다. 더군다나 미실은 남편인 세종을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고는 태연하게 색도를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정말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혹시 김부식이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고서 곡필의 붓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신라 황실의 후예이면서 고려 성리학의 백미였던 그로써는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자신의 조상을 금수만도 못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대까지 전해오던 서책을 참고하다보니, 곳곳에 난혼 및 족내혼의 흔적을 남겨놓고 말았다.

곡필의 붓은 들었지만, 아무리 회피를 해도 따라다니는 족내혼을 부식도 어쩔 수 없었다는 반증의 기록 하나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신(史臣)이 논(論)하여 말하기를, 처(妻)를 취함에 동성(同姓)의 사람으로 하지 아니함은 (부부의) 다름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노공(魯公)은 오(吳)나라에서 장가든 것이라든지, 진후(晉侯·평공)가 사희(四姬)를 둔 데 대하여 진(陳)의 사패(司敗·관명)와 정(鄭)의 자산(子産·공손교)이 크게 나무랐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동성을 취(娶)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子·조카)나 고이종자매(姑姨從 妹)를 빙(聘)하여 처( )를 삼기도 했다. 비록 외국이 각각 풍속을 달리할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흉노(匈奴)의 풍속에 어미를 증(烝·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간음하는 것)하고 자식도 보(報·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간음하는 것)함과 같음은 이보다 더 심한 편이다.

김부식도 이런 것을 말하면서 나름대로 심사숙고 한 결과였을 것이다. 특히 내물이사금 즉위년에 뜬금없이 신라의 혼도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내물이사금은 자신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황후까지도 모조리 김씨이다. 이것을 설명할 필요가 김부식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싫었지만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김부식의 고뇌가 800년을 뛰어넘어 하늘에 메아리친다. 신라의 역사를 밝히면서 화랑들의 전기, 그리고 당대의 유행노래인 향가 등을 기록하지 않았던 사유가 김부식에겐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아직도 ‘삼국사기’에 묻고 싶은 것이 저기 진산 금오산보다도 더 많이 남아 있음을 떨치지 못하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 함께 생각하고, 판단할 일인 것은 아닐까?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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