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회/문화 사회종합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이성원 기자 입력 2007.06.07 12:33 수정 2007.06.07 04:59

이성원의 철학에세이(6)

이성원의 철학에세이(6)

↑↑ 이 성 원

본지 편집국장
경북 선산 출생
대구 계성고교 졸업
경북대 철학과 졸업
경북일보 기자 역임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쉽게 말하면 네 주제 파악을 하라, 즉 '네가 너 자신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라'는 말이다. 너의 무지(無知)를 알아 '무지의 지(知)에 이르러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혹자는 소크라테스적 농담으로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 파악을, 수학을 풀어 봤으면 '분수'를 알아야 하고 철학을 접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던진다. 우스개 소리같지만 소크라테스를 대변하는 명언이다. 이는 지혜에 대해 모르면서 아는척 하지 말라는 말이다. 지혜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자는 무지를 인정하는 자보다 더 무식하고 건방지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고 그 다음은 나도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자야말로 지혜(Sophia)를 사랑하는(Philo) 학문, 철학(Philosophia)을 할 자격이 생긴다.

'너 자신을 위해 울라'는 의미와는…

아테네 청년들과 시민들을 현혹했다는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진리에 대한 정열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법규"라고 당당히 말하고 독배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너희들이 집행하고 있는 법이 악법인지 정의로운 법인지를 알라는 메시지를 호소하기 위해 감옥에서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고 독배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당시 희랍 사회의 합법성(이것이 악법이라는 논의는 별개의 문제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측면에서 그의 삶과 죽음은 일원화돼 있었다.

당시 소크라테스에게 내린 독배는 '혹세무민'을 앞세워 그의 죄가 아닌 악법이 만들어낸 죄를 뒤집어 씌운 잔이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 돌리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잔을 받은 것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상황이다. 당시 예수는 스스로 메시아(구원자)라고 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 등으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불경죄로 쓰디쓴 십자가의 잔을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혹죄로, 예수는 불경죄에 해당됐다. 아니 살인죄와 같은 흉악범도 아닌 이들에게 사형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가혹할 정도가 아니다. 정의파는 이 잔이 내려서는 안될 부당한 잔인 만큼 당장 거두어 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잔은 이미 예정된 잔이기에 거부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항상 따르고 있는 신(神) '다이모니온'(daimonion)의 신호에 따라, 예수는 주님의 작정에 따라 불가항력적으로 잔을 받아야 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엄습해 오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고 바로 눈앞에 둔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예수도 십자가를 지기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어 성경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예수가 신이라면 왜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할려고 하는가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을 잘 봐야한다. 그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며 인성(人性)에서 완전히 기도의 방향을 전환, 신성(神性)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 아들 예수가 죽어야 '예수'(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해낼 자란 뜻)라는 이름대로 아버지의 구속사역이 완성된다. 따라서 예수는 아버지의 구속사 프로그램에 맞춰 십자가를 질 때를 알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위해 죽음의 굴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많은 기독 신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놓고 안타깝게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을 보고 여인들이 울자 그는 "너자신을 위해 울라"고 했다. 유신(有神)론적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두고 '신앞에서 선 단독자'로 표현하면서 예수의 실존적 부분을 역설하고 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나는 절대자인 신 앞에선 상대자이지만 모든 상대적 인간 전체와는 특이하게 구분되는 유일무이한(唯一無二;Unique) 존재 가능성, 즉 실존으로 신앞에 서있는 단독자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웠는지 이를 본 여인들은 우리의 구세주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간절한 소망의 눈물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나는 나의 길을 갈뿐이다. 나의 길은 진리요, 생명이니 방관자적 입장에서 울지말고 너 자신의 고독한 십자가를 지고 내가 가고 있는 진리의 길을 함께 실존적으로 가자'는 의미로 키에르케고르는 해석하고 있다.

예수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당시 형식적으로 지키는 율법을 완벽히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식(겉치레)하는 자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겉치레로 지키는 모세의 율법은 지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법은 지켜지지 않고 되레 자기가 파놓은 율법의 무덤에 묻힐 뿐 아니라 자기가 놓은 율법의 올무에 걸려 들고 만다.

이를 두고 예수는 '회칠한 무덤'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억압과 죄악에 이르게 하는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고 새로 이뤄낸 사랑의 새 계명과 진리인 자신을 따라야 자유롭게 될 수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당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같은 혁명적 진리 선언은 숙청해야할 이단 중에 이단인 것이다.

정의와 지혜가 혁명을 도모한다면?

소크라테스도 예수처럼 인간인 이상 독배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이 도망가기를 권했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도망가서는 안된다'는 다이모니온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독약을 마시기전 법정에서 "진리에 대한 정열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법규"라고 당당히 말하고 그 쓰디쓴 잔을 받아 마셨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진리에 대한 정열이 재판정에서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을 현혹, 국가를 어지럽히고 망치게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는 유대 보수주의자들이 예수의 진리 전파로 수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르고 이러다간 결국 자신들이 애써 쌓아온 율법적 토대와 사회-종교적 지위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만큼 예수를 빨리 죽여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일련의 사태를 미리 막아보자는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신성 모독죄를 적용, 그를 십자가형에 처한 사건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당시 불합리한 제도와 법규에 맞서 항거, 정의와 자유의 사회를 도모하지 않고 왜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는 만큼 감옥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거부하지 않고 재빨리 나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감방에 가둔 악법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다시는 자신같은 억울한 경우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훨씬 멋있는 철인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도덕과 정의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한 공권력을 피하지 않고 수용한 것에 대해 크리톤에서 '불의를 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좋다'고 설명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합법적인 제도와 규범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감옥에서 탈출, 정의를 앞세워 악법을 고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시민들을 규합, 여기에 맞서 싸울 경우 폭력이 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는 악순환만 되풀이할 뿐이다.

요컨대 "정의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제도와 체제를 거부하면 혁명으로 이어지고, 혁명은 정의를 앞세워 거부하려 했던 폭력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칼 마르크스의 목적론과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는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한다. 그러나 신성치 못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목적은 결코 신성한 목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는 자신이 확신했던 정의와 도덕이 중요했지 이같은 폭력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수도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역설, 폭력을 부정했다. 예수는 로마의 속국인 유대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한 독립투사도 사회운동가도 아니다. 예수의 진리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해방신학'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신의 복음과 자유를 자기백성에게 안겨다 주는 '말씀운동'(Logos Movement)인 것이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면서 이땅의 로마 제국과 저 하늘의 왕국을 엄연히 구분했다.

물론 예수의 하늘나라 진리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리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고 화두를 열었다면 예수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는 '너 자신을 위해 울라'고 했다. 종교적 신앙과 철학적 인식의 입장에서는 '너 자신', '진리', '앎', '우는 것' 등이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렇다고 물과 기름이 영원히 섞일 수 없듯이 철학과 신학이 절대로 만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건 아니다. 중세시대 '철학이 신학의 시녀' 노릇을 했고 신학과 성경은 철학에서 답해 줄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나름대로 답해 주고 있는 만큼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 탐구인 철학과 신의 학문인 신학이 인간의 논리와 언어로 정립되는 학문(Science)이라는 측면에서는 얼마든지 서로 비교-분석하고 접목시킬 수 있겠다.


철학과 신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알려고 하거나 안다고 할 때 흔히 형이상학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빠져들기 쉬운 철학적 고민은 대개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신은 살아 있을까' '사후 세계는 어떨까' '이 세상은 끝이 있을까 없을까' 등….

그러나 이같은 의문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논리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궁극적인 문제를 놓고 아무리 형이상학적 놀음을 벌여봐도 속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논하는 형이상학을 실험과 검증을 통해 명석판명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자연과학같은 형이하학(학문:Science)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나는 신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면 믿겠다는 사람에게 사물처럼 볼수 없는 신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범주착오(Category mistake)'에 해당한다. 흔히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형이상학적 질문은 형이하학적으로 답을 내릴 수 없기에 인생에 정답이 없는 그것이 정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해답을 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질의를 끊임없이 던지면서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무언가가 없나하고 끝없이 방황하거나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종교에서 해답과 구원을 발견하기도 하고 혹자는 형이상학적 물음과 논의를 쓸데없는 사치스런 관념적 유희로 치부해 버리고 돈을 열심히 버는 등 일상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죽을 때까지 잊고 살 수는 없다. 종교적 진리로 이를 해소하거나 이 생의 쾌락 등에 빠져 고리타분한 형이상학을 망각한 채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는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뽐내면서 자기가 쌓아놓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이를 부정하는 정의의 도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방어한다. 이들 기득권 세력은 피지배 계층을 지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식 체계와 합법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지식이 모여 지배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에 대해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과학'의 저자인 하버마스는 특정 목적에 맞는 수단을 합리적으로 짜맞추는 지식은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지식인은 크게 인과적 자연 현상을 취급하는 '과학적 지신인'을 비롯, 편리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는 '기술적 지식인', 사회변혁과 개혁을 실현하는 지식을 도모하는 '혁명적 지식인'으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오늘날 이들 지식인과 기득권층 모두에게 고하는 철학적 명제다. 그리고 이같은 지식인을 매도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이들 지식인들 우위에 서있는 것처럼 자부하는 '지성인' 너희들도 똑같은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식인-기득권층을 향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비판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지혜'이다.

지혜는 지식과 다르다. 지식은 삶을 유용하게 하는 도구이다. 쉽게 말하면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은 지식이다. 암기는 남의 것을 퍼와서 내 기억속에 저장할 뿐 진정한 내 자신의 내면적 지혜가 아니다. 따라서 지식는 진정한 내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의 것을 외부에서 빌려 온 지식은 내 집에 물건을 하나씩 쌓아놓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나의 방안에 비싸고 화려한 가구나 책장, 골동품 등으로 가득 장식돼 있는 만족감은 내 자신의 진정한 내면 세계를 허영심으로 잠식해 들어간다. 샤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대자(對者)적 존재인 인간이 즉자(卽者)적으로 전락, 결국 '인간이 물화'(物化)되는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물화된 인간은 지식을 도구화하는 지식인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내면의 세계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즉 자족의 기쁨을 누리는 지혜자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지혜는 한마디로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이다. 물건처럼 소유하는 지식이 아닌 만큼 암기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깨달은 지혜는 내 자신 속에 나온 절대적 진리이기에 지식처럼 남에게 빌려 올수도 빌려 줄 수도 없다. 다만 나의 지혜를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지시로 어렴풋이 보여줄 수 있다.

동화의 비유를 들어보자. 동화는 어린이들이 읽는 책이지만 어른이 쓴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의 언어와 수준으로 동화를 쓰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동화를 그려내야 한다. 그러면서 어린이에게 주는 어른의 메시지와 교훈을 재미있게 동화에 남긴다. 동화는 그래서 쓰기가 어렵다.

차라리 어른의 이야기를 어른의 언어로 쓰는 일이 더 쉬울지 모른다. 어른의 메시지와 교훈이 지혜에 해당한다면 어른은 지혜자(철학자)에, 동화는 철학적 언어에 비유될 수 있겠다. 철학이 입문자에게 어려운 것은 철학자가 동화를 어른의 언어로 어렵게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의 논리를 아이들의 언어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게 동화적 철학의 근본적 한계다.

나아가 절대적 자아의 깨달음을 상대적인 사회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런지 모른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깊이 논의하다가 언어적 한계에 직면, 결국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게 된다. 그는 지혜와 각(覺)의 논리인 동양철학으로 서양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이데거(1889∼1976)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 469∼BC 399)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미 하이데거같은 철학적 한계를 예견한 탓일까.

소크라테스는 저술보다는 대화법을 동원, 그리스 시민들이 자기 자신의 '혼'(魂;psych)을 소중히 여겨 지혜에 이르게 하는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 소크라테스를 감옥에 가두고 독배를 내린 지식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간파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달을 가리키는 철학자는?

우리도 때로는 이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보이는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그 이면의 지혜를 간과하기 쉬운 게 우리네 일상사이다. 과거 연인의 사랑고백의 실례를 들어보자. 지금처럼 전자우편과 편지를 통해 구구절절이 자기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닌 옛날에는 흔히 사랑을 달에 비유하곤 했다.

조선의 전통적 여인은 지금처럼 남자가 맘에 든다고 쉽게 사랑을 고백하고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 왜 이런 민요 가사도 있지 않은가.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부끄러워하는 존재가 옛날 우리의 여인이이었다. 사랑이 얼마나 넘쳤기에 인사말도 못하고 행주치마를 입에 물었을까. 원래 절대의 경지에서는 말이 안나온다.

절대적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사랑을 무엇 무엇이라고 말하면 사랑은 거기에 갇히게 된다. 거짓말(허언:虛言) 같은 사랑 고백보다는 모든 참말(참은 차다;實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참말은 실언;實言이다)을 담고 있는 침묵이 모든 사랑의 언어를 대변할 수 있다. 시인 서정윤은 '홀로서기'에서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고 했다. 여기서 실언(失言)은 '말'이고 실언(實言)은 행동이다. 우리는 실언이 실언이 되지 않도록 실언하면 안된다. 그래서 말장난은 첨부터 장난이니 행동으로 장난쳐서도 안된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면 '염화미소'(拈華微笑)요, 불립문자(不立文字: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만큼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인 것이다. 상대에게 고작 하는 말이 "오늘따라 저 달이 왜 이리 밝지"이다. 이 한마디로 사랑 고백은 끝난다. 이 이상의 말이 있을 수 없다.

철학(哲;밝을 철 學;학문)이란 말도 지혜를 밝힌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인들은 달을 보지 못한 무지몽매자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달, 즉 지혜가 가득찬 광명의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지월(指月)의 여신'이다. 그러나 우매자들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기 쉽다. 달은 자유와 빛의 세계요, 손가락은 '불립문자'에 있어서 문자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당시 지식인들도 시민들에게 달을 가리키는 소크라테스의 손가락만 보고 이 손가락을 잘라 버린 우매한 짓을 범했다.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손가락질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그는 지식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면서 오만과 불의, 부도덕을 낳는 지식을 버리고 정의로운 지혜의 세계로 오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 '알라'는 앞서 설명한 지식으로 알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 지식인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식은 지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이러한 무지(無知)를 스스로 깨달아라(자각;自覺)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무지의 자각'을 촉구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방법으로 독배를 택한 것이다. 아니, 독인지 약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독을 마셨다. 독배는 부당한 사형선고를 내린 지식인들에게 대항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저항권이었다. 그는 몸둥아리 철인(鐵人)으로 태어나 철(哲)을 위해 철(鐵)을 마신 철인이다. 철인(鐵人)을 강요하는 오늘날 이 독배를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철인(哲人)은 어디에 있을까.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