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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배(白裵)성주참외가요제'를 제안합니다(1) - 김지수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6.09.15 09:50 수정 2026.09.15 09:50


↑↑ 김 지 수 前 도의원 / 성주한의원 원장
ⓒ 성주신문

 

일찍이 성주는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명현의 출현과 더불어 각종 문화 또한 앞섰습니다. 이런 가운데 1914년에 백년설(본명 이창민) 선생이, 1938년에는 작곡가 배상태 선생이 출생하여 근대 성주 음악문화의 선두주자가 되심은 지역의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성주의 전성기로 여겨지던 조선시대를 마감하고, 현대에 이를수록 성주군의 위상과 인구마저 줄어들던 2003년 '제1회 백년설가요제'가 개최되었지만 1회성 행사에 그쳐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평소 자주 뵙는 주민 여러분과 저의 뜻이 별다르지 않아 오랜 고심 끝에 세 분, 즉 백년설, 배상태, 배호 선생을 기념하는 '백배성주참외가요제'의 발족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군민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음악을 제외한다면 인생 자체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지금도 대부분의 언론매체를 뒤덮고 있는 트로트 열풍 이상으로, 한일합방 말기 즈음인 1940년경에는 이미 전국적인 명성과 영향력이 큰 백년설 선생으로서는 일제의 온갖 압박을 피할 수 없음도 명명백백했을 것입니다.

이같은 사례가 어찌 백년설 가수에만 국한되었겠습니까? 당대 최정상의 남인수, 이난영 가수 또한 당연히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광복이 가깝고 태평양전쟁이 심해질수록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은 한층 노골화하여 세 분 모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그대와 나>, <신춘엽서>, <아들의 혈서> 등의 징병가를 강요받아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진퇴양난의 일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당시 상황을 감안할지라도 친일 행적은 결코 가벼운 허물이 아니었습니다.

2003년 제1회 백년설가요제가 출범하여 필자도 참석하였으나 본 행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다분히 있었습니다. 성주군 일부 사회단체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이같은 결과를 예견하고서도 사전에 소통을 게을리한 가요제 준비위원회의 진행 또한 책임이 가볍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낳은 제1회 백년설가요제 문제는 우리 지역보다 한결 먼저 시작한 '남인수가요제', '이난영가요제' 등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음을 충분히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남인수 선생의 경우는 1996년 남인수가요제로 출발해서 2008년까지 지속되다 중단되었고, 2022년 다시 시작되었으나 계속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그러는 사이 2023년에 '진주가인가요제'가 발족되어 4회를 맞고 있습니다.

목포의 이난영가요제는 군국가요를 2~3곡 부른 것이 확인되었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점 등을 헤아려 남인수가요제와 달리 지금껏 별다른 문제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지역은 제1회 백년설가요제가 중단된 이후 잠시 '성주가요제'로 변경되었다가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4년에 재점화의 기회가 마련되는가 싶더니 끝내 여의치 못했습니다. 이후 논란이 된 인물의 이름을 딴 행사 대신, 성주 주민들의 실제 삶터와 밀착된 문화를 기념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역 대표 특산물인 참외를 전면에 내세운 '성주참외가요제'가 대안적 성격으로 새롭게 기획되어 코로나19 등 여러 재난 상황으로 인한 공백기를 이겨내고, 2026년 5월에는 제11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약 5천여명의 관람객이 운집한 가운데 종료되어 지역 문화행사로서의 입지를 다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그동안 우리 모두가 힘들게 겪은 갈등과 고뇌, 그리고 새롭게 드러난 사실 등을 고려하여 우리 지역과 관련이 밀접한 세 분 거인의 발자취를 살펴본 뒤, 합리적 방안의 실마리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Ⅰ. 가수 백년설(白年雪, 1914~1980)

 

가수 백년설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활약하며 대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한국 대중음악사의 굵직한 인물입니다. 남인수와 함께 1940년대 가요계를 양분했던 대표적인 국민 가수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생애와 활동 자료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기본 정보

·출생과 초기활동 : 1914년 12월 5일(음)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 아버지 이형순(1887년, 성주이씨 문열공파)과 어머니 김차악(1887년)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고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현.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합니다.

·본명 : 이갑룡(李甲龍) → 1964년 이창민(李昌民)으로 정식 개명 (작사가로 활동할 때는 '향노(鄕奴)'라는 필명 사용)

·생몰 : 1914년 12월 5일 (경북 성주) ~ 1980년 12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데뷔 : 1938년 노래 〈유랑극단〉

2. 생애와 주요 활동

 

·데뷔와 전성기 : 학창시절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38년 일본 고베에 머물던 중,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작사한 〈유랑극단〉을 녹음하게 되었습니다. 이 곡이 이듬해 발매되어 큰 성공을 거두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발표한 1940년 작 <나그네 설움>이 당시로는 경이적인 기록인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기교가 화려하기보다는 구수하고 서민적인 한이 짙게 배어있어, 식민지 대중들의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광복 이후와 은퇴 :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 활동보다는 영화 제작, 목재상 등 개인사업과 고아원 운영 등 자선사업에 더 매진했습니다. 당시 청동원(靑童園) 고아원은 경상북도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인연을 계기로 경상북도 사회사업 연합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6.25 전쟁 발발로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부산 KBS 상임지휘자를 맡기도 했습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1961년에는한국연예협회기획분과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1963년 공식 은퇴공연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고, 1960년대 후반에는 경향신문 일본지사장(1967~1970)을 지내는 등 이색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만년 : 1970년대 중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가 회복한 후, 1979년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민생활 적응 중이던 1980년 타계했습니다. 사후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습니다.

3. 대표 히트곡

·<나그네 설움>(1940) : 백년설의 최대 히트곡입니다. 나라를 잃고 떠도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나그네'에 빗대어 표현해 당대 대중들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었습니다.

·<번지 없는 주막>(1940) : 헐벗고 굶주리던 동포들의 애환과 슬픔을 담은 곡으로 연이어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 기타 명곡 : <대지의 항구>, <고향설>, <복지 만리>, <두견화 사랑> 등 광복 전까지 약 80여곡의 굵직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4. 친일 행적 논란과 엇갈린 평가

백년설의 생애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은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 당시의 행보입니다.

·친일 가요 가창 :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가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그는 <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등 일제의 징병과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군국가요를 불렀습니다.

·명단 등재와 기각 :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음악 부문에 이름이 오르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2009년 대한민국 정부 산하'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의 공식 발표명단에서는 소속사의 강압에 의한 수동적 참여였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기각(제외)되었습니다.

· 지역사회의 갈등 :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는 '백년설 가요제' 개최와 노래비·동상 건립을 두고 "지역 출신의 위대한 대중 예술인을 기려야 한다"는 입장과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을 기념할 수 없다"는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오랫동안 팽팽하게 맞서며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백년설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슬픔을 달래준 '국민 가수'라는 빛나는 영광과, 시대의 강압에 얽혀 군국가요를 불렀다는 뼈아픈 오점을 동시에 지닌 입체적인 역사적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호에 배상태·배호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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