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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가 사라진 운동장 - 석종출

이수영 기자 입력 2026.10.27 09:56 수정 2026.10.27 09:56

 

↑↑ 석 종 출 성주군 평통자문위원
ⓒ 성주신문

 

가을 햇살이 유난히 맑은 날이다. 내가 다녔던 오래된 초등학교 앞에 발걸음을 멈춘다. 교문은 예전 그대로인 듯했으나 운동장은 낯설다. 아이들이 뛰놀던 넓은 마당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늙은 느티나무만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득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가 떠오른다. 그 시절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는 면(面)에서 가장 큰 잔치였다.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이면 학교에서는 운동회 날짜를 알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운동회 전날이면 선생님들과 고학년 학생들이 운동장에 하얀 석회가루로 달리기 선을 긋고 청군과 백군의 깃발을 세웠다. 운동장 위로 줄지어 걸린 오색 만국기는 가을바람에 나부꼈다.

운동회 날 아침은 특별했다. 아직 해가 산마루에 걸리기 전부터 마을은 부산했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말고 달걀과 땅콩과 알밤을 삶았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어려웠던 사이다와 과자도 그날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집집마다 도시락 보따리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운동장에는 동네별로 혹은 학년별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멍석을 깔고 둘러앉은 어른들은 서로 음식을 나누며 막걸리 한 사발에 웃음꽃이 피었고,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은 농사 이야기와 자식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운동회가 시작되면 온 넓은 운동장이 들썩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응원 소리가 가을 하늘로 퍼져 나갔다. 달리기에서 일등을 한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의기양양했고 넘어져 무릎이 까진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등을 두드려 주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하다.

운동회의 백미는 역시 청백 계주였다. 마지막 주자가 운동장을 내달리면 어른들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가에 따라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그러나 승패는 오래가지 않았다. 모두가 웃으며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의 공굴리기와 아버지들의 줄다리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평소 점잖던 동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고, 어린 동생들은 형과 누나를 찾아 운동장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운동회날 만큼은 학교가 마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 학년에 몇 반씩 있던 교실은 전교생이 한 반일 정도로 줄었고, 전교생을 모두 합쳐도 스무 명 남짓한 학교가 낯설지 않다.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온 마을이 모여 청군과 백군을 응원하던 그 시절의 운동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졌다. 운동장에는 여전히 달리기할 공간이 있고, 교실에는 책상과 칠판이 있다. 그러나 그곳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다시 교문 안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만국기가 펄럭인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던 행진곡,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하던 아이들, 결승선 너머에서 두 팔 벌려 기다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가 가난했다. 도시락 반찬도 넉넉하지 않았고 운동화 한 켤레가 귀했다. 그러나 운동회 날만큼은 누구나 풍요로웠다. 함께 웃을 이웃이 있었고, 손을 잡아 줄 어른이 있었으며, 내일도 이 마을에 아이들이 자라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농촌의 가을은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면서도 어딘가 쓸쓸하다. 들판에는 황금빛 벼가 익어 가지만 마을에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학교의 학생 수가 줄어드는 일이 아니다. 마을의 미래가 조금씩 비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 앞을 떠나며 다시 한번 운동장을 돌아보았다. 늙은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가을바람이 지나간다.

그 바람 소리에서 나는 오래전 운동회의 함성을 들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그러나 이제 그 함성은 기억 속에서만 되풀이될 뿐이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빈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발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다. 한때 서로의 하루를 묻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이웃들도 하나둘 떠나고, 남은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바람처럼 희미해져 갔다. 아, 그리운 시절이여.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사라져버린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날의 운동장을 돌아보게 되는 시절이 되었다.

그때는 운동장에 아이들이 가득했고, 마을에는 내일이 가득했다. 이제 만국기는 사라지고 운동장은 비어 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날의 함성과 따뜻한 웃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추억이라기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한 공동체의 마지막 빛처럼 오래도록 가슴을 아프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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