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회/문화 사회종합

보현십원가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3 13:53 수정 0000.00.00 00:00

균여대사의 ....

삼천리금수강산 골골이 축제에 들떠있다. 마음도 하늘 높이 나르고, 떨어진 꽃잎 역시 저만치 공중을 향해 나래를 편다. 이 꽃이 피면, 저 꽃이 준비를 하는 등, 연이어 팡파르를 울려 새아씨 분홍빛 마음만 전율을 느끼게 하던 봄날이 이젠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며 갈 길을 재촉한다. 올핸, 하고 기다리던 옆구리는 역시, 하고 사정없이 매몰차게 사라져 버린다.

ⓒ 경주신문사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지가 벌써 한 해가 가려고 한다. 골마다 숨어있는 향가의 깊은 속내의 향내 맡기를 기대감에 부풀어 항상 발길이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곤 하였다. 오늘은 그 발길을 멈추고, 향가의 노래 속으로 침잠해 본다.

신라는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치면서 천년의 역사가 그만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슬픈 마의태자는 개골산(皆骨山:금강산이 모두 다 바위로 되어 있어 이렇게도 불렀다.)으로 들어가 망국의 한을 포효하며, 오지 못할 영원한 사바세계로 떠난 지가 오래이다. 천년황도 서라벌에 울려 퍼졌던 향가도 망국과 함께 서서히 저녁노을 가장자리로 들어갔다. 다시는 누구라도 불러주지 않을 착잡함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고려는 4대 황제 광종(光宗:재위 949∼975) 대가 되면 개국의 혼란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때였다. 영민한 광종은 처음에는 호족세력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안으로는 화엄종, 법상종으로 대별되는 불교종파를 아우르려는 사상 통일작업에 분주하였다. 이때 발탁된 고승이 균여대사(923:신라 경명왕 7년에 태어남-973)이다. 균여대사는 그 생김새가 너무나 못생겨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심지어는 송나라 사신이 만나기를 청해도 고려 조정에서는 그 외모를 문제 삼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최고 개혁군주 광종을 만나면서부터 물 만난 고기마냥 흐트러진 민심을 불심을 이용하여 하나로 모이게 하였다. 특히 광종과 균여대사는 하층민을 사랑하는 부분에서는 그 뜻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고 한다.

일단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광종은 그동안 준비하였던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먼저 개국 초부터 호족들의 나라라고 까지 하였던 지방 호족들의 권세를 제압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시행한다. 노비안검법이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선별하여 양인으로 풀어주는 법이였다. 그러나 노비가 곧 경제력의 바탕이던 호족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법이었다. 호족들은 힘을 합해 광종에게 대항해 보지만, 즉위 후 7년간이나 벼르고 벼른 끝에 나온 정책이기에 광종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구나 광종은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란 형태를 빌어 과거제 시행을 공표하였다. 그동안 고려귀족들은 개국공신 집안이면 아무런 문무의 재주 없이 모든 국가권력을 독차지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노비안검법으로 한풀 꺾인 고려 호족들은 다시 과거제라는 철퇴를 맞자, 삼삼오오 살 길을 찾아 사분오열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고려의 호족들은 자손대대로 영화를 누리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초들의 삶을 도륙 내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층 백성을 위한 군주의 사랑 앞에 그 누구도 다른 명분으로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는 곳에 균여대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균여는 향가를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도구’라고 하면서 향가를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때 균여가 부른 노래가 ‘보현십원가’이다. 총 11수의 향찰로 기록된 ‘보현십원가’는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에 실려 오늘에 전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최행귀가 이 향가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최행귀는 번역을 하면서 ‘삼구육명’이란 향가의 형식을 지칭하는 듯한 말을 덧 붙여 놓았다. 아직까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구자들도 정확히 모른다.

균여가 백성들을 불심으로 돌아오게 하였던 향가 ‘보현십원가’ 중 총결하는 ‘총결가’를 현대어로 불러보면 다음과 같다.

중생계 다하면
내 원(願)도 다할 날도 있으니
중생을 깨움이
끝 모를 해원(海願)이고
이러이 가면
가는 대로 선(善)길이여
이와 보현행원(普賢行願)이며
또 부처의 일이더라
아으 보현의 마음을 알아
이밖의 타사사(他事捨)하고자.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는 가장 이른 시기 향찰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문학적 큰 의의가 있다. 균여전이 1075년 고려 문종 때 완성되었고, 향가 14수가 수록된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1년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200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향찰을 두고, 먼저 수록된 ‘균여전’이 신라시대 향찰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가 자주 내리고 있다. 푸른 마음엔 더없이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동안 밟았던 향가의 발자취가 이제 한 곳에 모아져서 세상 밖으로 여행을 할 것 같다.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한다.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블로그 : ttp://blog.daum.net/dpjw322, pjw322@yahoo.co.kr>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