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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6.25전쟁은 이렇게 당했다

서태호 기자 입력 2008.06.27 08:38 수정 2008.06.27 06:45

6.25전쟁은 이렇게 당했다

↑↑ 6.25참전유공자 성주군지회 지회장 김 성관
ⓒ 성주신문



6.25전쟁 개요

ⓒ 성주신문
6.25전쟁은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의 모택동,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남북 적화통일을 위한 전략전술의 일환으로 중공의 현대화 장비로 중무장한 병력을 지원받아 불법으로 38선 남침을 감행한 무력 도발이었고, 늦어도 동년 8월 15일까지는 부산까지 점령할 목적으로 속전속결의 기세로 노도와 같이 공격해 왔다.

이때 북한군은 20만 명의 대병력으로 120밀리 박격포 226문과 82밀리 박격포 172문을 포함하여 508문의 곡사포, 대전차포 560문, T34 전차 242대, 장갑차54대, SU-76 자주포 176문, 항공기 211대 등의 중무장으로 남침을 감행해 왔다.

이때 우리 군의 최전방 38선 경비부대는 M1 소총, 칼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후방부대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식 38식 소총을 사용했다. 81밀리, 60밀리 박격포 등이 960문, 105밀리 곡사포 91문, 대전차포 57밀리 140문, 전차가 명중되어도 파괴되지 않는 2.36인치 로켓포 1,900정. 장갑차 27대, 연습용과 연락 비행기 22대 정도였다.

게다가 군의 병력도 대부대 훈련도 한번 해보지 못한 전후방 합하여 10만 명이었으니, 병력과 장비가 북한군에 비하여 엄청나게 열세한 데다 그네들은 북한 정권이 수립된 직후부터 남침을 위하여 대부대 기동훈련으로 전술전기를 연마라고 군의 기동력 또한 우리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수시로 38선에서 기습작전으로 우리를 괴롭혔고 1949년 들어선 38선 중 요 지점에서 국지전을 전개해 우리 군대의 장비와 전술 등을 시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잘 훈련되고 소련의 신형 무기로 중무장한 인민군의 공격은 6월 25일 일요일을 택하여 시작되었다. 남쪽의 우리 군은 일요일을 기하여 외출 외박으로 병력의 3분의 2 정도만 경계경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38선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의 우리 군은 육탄으로 몰아닥치는 노도와 같은 적에 대적할 수밖에 없었고 철두철미한 반공사상으로 정신무장된 구국일념으로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나 적의 남침이 시작된 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23일만에 우리 군 최후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면서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면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때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때 낙동강 방어가 그 얼마나 다급했던지 미군의 고위층에서는 한국군의 2∼3개 사단을 포함한 다수 민간을 철수할 계획까지 세웠으며 이것을 안 이승만 대통령은 노기 찬 말로 '미군은 갈테면 가라고 해. 우리는 결코 여기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전했다고 한다.

특히 8월 16일 왜관 북방에 4만 명의 적이 낙동강변에 집결했다는 정보에 B29 폭격기 98대가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 낙동강 전선으로 침투하려고 하는 적의 진중에 융단폭격을 감행,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어 적군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켰다.

이 낙동강전투는 그야말로 국민총궐기 방어전투였다. 우리가 만일 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치 못하고 돌파당하였으면 적은 순식간에 부산까지 점령하였을 것이고 이 나라는 김일성의 적화통일 전략에 흡수되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생각만 해도 몸에 소름이 끼친다.

1975년 4월 30일 우리의 우방이었던 월남의 패망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수백만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보트피플이 되어 떠돌았으며 수십만 명의 학살의 비극, 이것이 바로 공산침략자들의 작태이고 만행이었다.

그러나 우린 군은 끝까지 반공정신의 무장으로 용전 분투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그 전기를 잡아 북진을 계속했다. 우리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진격, 남북통일을 목전에 두고 승전고를 울리기 직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100만 대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의를 상실하여 우리 군은 또다시 철수의 쓰라린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군은 제공권을 가진 미 공군의 지원과 미 해군의 강력한 지원 등으로 각 지역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양하면서 분투하며 북진을 계속하는 와중에 휴전이 성립되어 현진출 방어선에서 멈추고 휴전선이 그어졌다.
이때가 1953년 7월 27일이었다.

6.25전쟁 피해

1) 아군피해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 포로 합계
149,005명 714,083명 132,256명 9,634명 1,004,978명

2)유엔군 피해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 합계
57,615명 115,312명 8,897명 181,824명


‘보훈의 달’ 6.25참전유공자회 활동

(사)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성주군지회(회장 김성관)에서는 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 증언록 배포, 회원 소방안전교육 및 위로연 개최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쳤다.

6.25전쟁 증언록 Ⅱ집은 (사)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에서 왜곡된 전쟁역사가 청소년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발간한 것으로, 호국영령들의 빛나는 공적과 충성스러웠던 실상을 전후 세대에게 바로 알리고, 허술했던 전쟁대비태세가 낳은 국가재난을 온고지신으로 되새겨 전쟁억제와 대비태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고 발간이유를 밝히고 있다.

증언록에서는 참전용사들이 전장에서 겪었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선대의 처절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호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김 회장은 10여권의 증언록을 확보해 군청, 경찰서, 교육청 및 학교 등의 기관에 배포한 바 있다.

지난 11일에는 道로부터 버스 3대를 지원 받아 유공자회 회원 120여명과 여성소방대원 및 재향군인회 여성회원들에게 경북소방학교 노인 소방교육 참석과 안보교육, 영주 일원 문화탐방 기회도 제공했으며, 가천 서부농협과 협의하여 70여명의 가천 금수 보훈 가족들을 격려 및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25일에는 제58주년 6.25기념행사가 성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리며, 보훈단체, 각 군 전우회, 6.25참전 전우회, 고엽제 전우회, 재향군인회, 자유총연맹 등 1천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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