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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스승의 날 ‘土岩 蔡命得’ 선생님을 생각하며

서태호 기자 입력 2009.05.15 09:06 수정 2009.05.15 09:10

배태영 (성주여중고 초기 교감ㆍ경희대 전 부총장)

↑↑ 배태영 (성주여중고 초기 교감ㆍ경희대 전 부총장)
ⓒ 성주신문
“선생님, 제가 제대를 하고 제일 먼저 선생님을 찾아뵌 것은 선생님에게 고백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1954년 3월 26일 성주교육청 장학사실을 찾아가 하나님에게 고해한 사실을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제가 4학년 때 다달이 내는 월사금을 내지 않았는데도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독촉을 안 하시고 그냥 넘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막 제대를 해서 수중에 돈이 없습니다만, 취직하면 그 돈 꼭 갚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말씀하셨다. “나는 도통 모르는 일이니 그런 거북한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말고, 어디 취직이 될 때까지 내가 하는 일이나 좀 도와주게. 여기 여자중학교가 신설되었는데, 내가 수학을 가르치고 있네. 신학기부터는 자네가 그 일을 좀 맡아주게. 영문과를 나왔지만 자네라면 중학교 수학쯤은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걸세”

13년 전 잘못을 빌려 갔다가 거절할 수 없는 짐보따리를 하나 메고 돌아왔다. 군복무 간 알게된 경남 장학관 김성태 장로로부터 제대하면 취직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선생님에게 하지 못했다. 한 달 치 월사금 1원50전을 속인 데 대한 속죄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학교를 찾아가 봤다. 일제시대 신사 터에 세워진 학교인데 운동장에는 커다란 바윗돌이 여기저기 그대로 박혀 있고, 교사라고는 3간 목조 건물이 고작이었다. 교실은 천장도 되어 있지 않고 흙바닥 그대로였다. 학생 수는 전학년을 합해서 100명 정도이고, 교문도 없는 학교 입구 꿀밤나무에 ‘星州女子中學’이라는 간판이 매달려 있었다. 정식 중학교인가를 받지 못해 ‘學’자 밑에 ‘校’자를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학원띠기’라는 조롱과 야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여학생들은 대부분 성주중과 성광중에 다니고 있었고, 우리 학교를 찾아온 학생들은 대개가 집이 가난하거나(공납금이 다른 학교의 반도 안 되었다) 남녀공학을 꺼리는 일부 가정의 학생들이었다. 그러니 선생님들에 대한 대우도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개척자의 정신으로 내가 세운 학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악물었다.

이듬해(1955년) 중학교 설립인가가 나고, 채명득 선생님을 초대 교장으로 모셨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학사 자리를 내놓자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다. 당장에 경제적 타격은 뻔한 일이고, 장학사로 있으면 더 좋은 대우에 장차 교육감에 오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낙후된 사회를 일으켜 세우려면 먼저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에 좋은 조건과 야망을 물리치고 개척자로서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학교인가가 나면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들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정원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학생 하나라도 더 보태기 위해서 수업이 끝나면 벽진, 초전, 월항, 선남 등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서 달빛을 밟고 빵 조각을 먹으면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교장, 교사, 설립자(김선효ㆍ류삼식ㆍ조동호)와 직원 모두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일종의 투쟁이었다.
여학생을 양보 받기 위해 성주중 선생님들을 초대하여 교실 천장이 그을리도록 불고기 파티를 벌였다. 굽실거리는 굴욕에 접대부 같이 애교도 부려봤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의 약속과 술이 깨고 난 후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고 인내하며 또 다시 접근하는 끈기와 덕을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어느 날 또 한 차례 여학생 양보를 위한 섭외 파티가 시작되었다. 12시가 넘도록 술잔만 오갈 뿐 별 진전이 없었다. 술에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선생님을 학교 숙직실로 모시고 왔다. “그러나 역사는 진행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이 좋아해서 술에 자주 취하시는 줄만 알았지, 망망대해를 향해 노를 잡은 선장으로서의 고뇌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적었다.

섭외로는 여학생 흡수가 불가능한 것을 깨달은 선생님은 그 노력을 내실화에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1956년 3월 고등학교인가를 얻어내고, 여학교로서의 특수성을 살리는 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수예품 전시회를 통해서 군민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대구 문화서점 주인용 사장으로부터 많은 도서를 기증 받아 도서실의 면모를 갖췄다. 연세대 음대 출신 음악선생을 초빙하고 피아노를 사들여 정서교육에 힘쓰는 한편, 체육교육을 강화하여 여중 배구팀이 전국체전 결승전까지 진출하고, 육상팀이 도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상급학교 진학률이 해를 거듭할수록 향상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주여중고는 차츰 군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여학교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드디어 성주중과 농고가 손을 들었다. 성광중고가 여학생 모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혈(臥牛穴)’ 성주의 소머리에 여자가 올라앉아 남자들이 기를 쓰지 못한다”고 끈질기게 학교 이전을 주장하던 완고한 어른들도 앞다투어 학교의 발전을 축복해주었다. 해치려는 자가 있어도 저주하지 않고, 속이려는 자가 있으면 속아주고,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돌아가며, 남을 믿되 당신의 마음처럼 믿는 그 어진 성품에, 그러면서도 학교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는 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선생님의 리더십이 오늘의 성주여중고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선생님의 아호 ‘토암(土岩)’이 암시하듯 비에 씻기고 바람에 깎여 토암(흙바위) 그 자체는 모습을 잃어가도 씻기고 깎인 그 흙은 새로운 생명체의 온상으로 영원히 작용할 것이다.
선생님 곁을 떠난 지 40년에 가깝고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도 수년이 지났지만 나는 성주여중고와 함께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 거기 계시는 동안은 그 곳은 언제나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었다. 선생님께서 정년퇴임하면 내가 그 바톤을 이어 받으려는 주제넘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렇게도 아끼고 정성 들여 가꾸어오신 성주여중고를 30년만에 도중하차하셨다.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누가 뭐래도 성주여중고는 토암 선생님의 창작품인 것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선생님의 교육이상의 화신(化身)이 곧 성주여중고라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직 30년 동안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성주여중고만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나는 안다.

“날이 날마다 오가는 길에 너만 있어/ 밤이 밤마다 꿈꾸는 곳에 너만 있어/우물 속의 한 마리 운명의 개구리 마냥 나는 너만을 숨쉬며 살아간다” 이것이 그분의 노래요 꿈이요 삶이었다. 학교가 재정난에 부딪혔을 때 당신의 봉급을 포기하고, 재단 확충을 위해 사재도 바쳤으며, 사모님의 병구완보다 학교 일을 앞세우셨다. 당신의 건강보다 학교의 발전을 우선했다. 일찍이 건강을 잃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성주여중고에 모든 정력을 소진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런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교정의 꿀밤나무가, 선생님의 손 땀이 밴 건물 벽돌들이 소리내어 말할 것이다. 선생님이 성주여중고에 쏟으신 심혈이 그 얼마나 고귀하였는지 글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표현이 부족하지만, 이 학교를 거쳐 나온 성주의 딸들이 두고두고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선생님이 얼마나 교육에 성실하셨는지, 얼마나 생활에 진솔하셨는지, 얼마나 타인을 믿으셨는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치명상을 입으셨는지, 얼마나 제자를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성주여중고에 헌신하셨는지, 진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일일이 치부해 두셨으리라 나는 믿는다.

“협동단결ㆍ정서도야ㆍ일인일기(교훈)를/ 나가서나 남아서나 굳게 붙잡고/ 언니 아우 한 그루 혼이 뭉쳐서/ 영원무궁 빛내리 모교의 전통” 이 졸업식 노래 마지막 절의 메아리는 선생님의 발걸음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도 그분의 정신과 혼은 남정리 동산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일찍이 후진들이 선생님에게 붙여준 명예스러운 별명 “성주의 상록수” 토암 채명득 선생! 그 이름이 성주 교육 40년, 성주여중고 초기 30년과 함께 길이길이 남아 빛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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