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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상 섭 재경성주중고 동문회장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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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거목이며 성주가 낳은 자랑스러운 정치인! 범몽 유성환 의원님께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고향땅에 묻히셨다.
다시는 못 오실 먼길을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동지들과 시민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떠나가셨다. 이곳에 모인 모두의 슬픔과 마음은 하나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한마디 말도 없이 혼자만 훌쩍 떠나시면, 남은 우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인고의 세월을 오로지 한사람만 바라보면서, 말없이 견뎌오신 착하디착한 사모님은 혼자서 어찌 살며, 믿고 따르던 피붙이 동지들은 또 어이하란 말입니까?
그토록 갈망하던 남북통일은 또 어이하란 말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급하셨기에 무서운 폭염 속에 떠나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범몽은 가셨다.
새벽 무렵 궂은 소식 접하고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지난 46년 동안 저의 내면에 아로새겨주신 수많은 일들이 솟구칩니다.
지난 설날에 세배 온 저에게 "이 박사, 내가 죽거든 너무 많이 울지 말게나, 그리고 동문회에 돈을 조금 내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가슴을 때립니다. 꼭 하라시며 숙제도 하나 내셨습니다.
불과 삼개월전인 4월1일,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만난 중국집, "내일이면 서울생활 33년을 마무리하고 대구로 떠난다. 신병치료와 노후를 고향 옆에서 보내고 싶다"며 내민 하얀 봉투, 겉봉엔 정불멸(情不滅)이라 쓴 글씨와 기부금 백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식사 후 방배동 고개를 넘으시면서 열 발자국도 못가시고 계속 돌아보며 손 흔드시던 애절한 그 모습이 이별 통보였음을 무지한 저는 이제서야 땅을 칩니다.
보름전 병실에선 아예 못 알아보셔서 더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이렇게 찰나(刹那)에 가시다니 기가 찰뿐입니다.
의원님 말씀대로 내일부턴 꾹 참겠습니다. 비록 의원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의원님을 보내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가슴 가슴과 이 나라 정치사에 영원히 남아있으며, 소중히 간직함이 남은 자의 도리며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었지만 의원님께서 남긴 찬란한 업적은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등불이 되었습니다.
서슬이 시퍼렇던 군부독재시절에 전국최초로 '민주(경민)산악회를 발족'해 군정종식의 기틀을 만드셨으며, 천신만고 끝에 입성한 국회에서 소위 '통일국시론'으로 겪은 고초와 희생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내외 공론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의원님은 권력 앞에 무기력해지는 '정의'의 가치를 행동과 철학으로 보여주셨으며, 힘없는 약자에겐 언제나 관대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반칙을 하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사셨습니다. 인정도 눈물도 많으셨고 한없이 순수하셨으나 늘 뜨거우셨습니다.
이것이 일명 '유성환 정신' 즉, 정의와 사랑입니다. 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서럽기 그지없지만 그 정신 계승하며 도도히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 당부하신 숙제도 빨리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근심걱정 내려놓고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지켜봐주십시오.
무수한 별이 뜨고 사라져가도 천년을 하루같이 그 자리에 남아, 뭇별들의 중심축인 북극성처럼,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한치앞이 안 보이는 칠흑의 어둠속에서도, 시대의 길잡이로 영원히 남아 주소서! 언제나 우뚝하소서!
누가 뭐래도 우리시대 최고의 진정한 정치인! 범몽 유성환 의원!
저승에선 부디 양지에서 영면하소서! 의원님과의 만남은 생애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생에서도 꼭 다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사전에 더 좋은 말을 찾지 못해 이 말로 마지막 인사를 올립니다. 의원님! 많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편안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