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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 종 출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이사 |
| ⓒ 성주신문 |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국회의사당의 웅장한 건물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정치인의 화려한 연설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한 사람이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한 장을 건네받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소중한 한 표"라는 말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많은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투표를 하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린 유권자들이 끝내 투표용지를 받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투표 절차가 지연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선거관리 당국은 고의가 아닌 업무상 과실과 예측 실패에 따른 행정적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만으로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의 여부만이 아니다. 국민들이 느끼는 실망감과 분노는 단순히 몇 장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국민의 참정권이 충분히 존중받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여러 기본권 가운데 참정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국민이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다른 모든 정치적 권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고 재산권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국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결국 투표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권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주권자의 자격을 확인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단순한 행정 착오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설령 그 원인이 담당자의 판단 착오였고 준비 부족이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국민의 참정권 행사에 영향을 미쳤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다. 국민들이 선거관리 당국에 요구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만큼은 그 실수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집회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집회의 참가자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행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선거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을 표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국민의 한 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이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점도 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한 행정 실패를 곧바로 조직적 선거 조작이나 민주주의 파괴 행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사실에 근거한 판단도 요구한다. 분노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냉정함 또한 민주사회의 중요한 덕목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 선거관리 기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권자의 참정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더욱 철저한 준비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정치권 역시 이 문제를 정쟁의 수단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제도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셋째, 국민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는지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끝나는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날부터 다시 시작된다. 국민의 한 표가 존중받는 사회, 행정의 실수조차 국민 앞에 겸허히 설명하는 사회, 그리고 잘못이 있을 때는 책임을 지는 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의 모습일 것이다.
투표용지 한 장에는 국민주권이라는 무거운 가치가 담겨 있다. 이번 논란이 단순한 소모적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참정권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는 결국 투표용지의 숫자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