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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수필 햇살 품고 걸어온 길 - 내 마음속에 걸린 수채화

이수영 기자 입력 2026.07.07 10:01 수정 2026.07.07 10:01

 

↑↑ 주 설 자 시와시학회 회장
ⓒ 성주신문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윤석중 작사, 한용희 작곡, 「고향 땅」). 이 동요는 6·25전쟁 직후 실향민들에 의해 애창되었으며 내 또래들도 학교에서 배워 많이 부른 노래이다. 이 동요에서 느껴지듯 고향은 누구에게나 어머니 품같이 한없이 그리운 곳이며, 현대 문명에 찌든 이들에게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순수한 자연의 처소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경북 성주읍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성산 끝자락이다. 이곳에는 '산막터'가 있고 많은 꽃이 예쁘게 피어나는 경치 좋고 인심 좋은 농촌 마을이다. 특히 봄 소식을 알리는 진달래꽃과 5월에 피어나는 찔레꽃은 유난히 곱고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곱게 핀 진달래와 하얀 찔레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릴 적 추억 속으로 젖어든다.

진달래와 찔레꽃잎은 어린 우리들에게 맛있는 간식거리이자 장난감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꽃잎을 따 먹는가 하면, 또 예쁜 꽃을 머리에 꽂고 한껏 멋을 부리며 온 동네를 즐겁게 뛰어다녔다. 이렇게 뛰어놀다 집에 오면 배가 고팠다. 이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달걀밥은 칠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달걀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집에서 기르던 닭이 알을 낳으면 그 끝에 조그마하게 구멍을 내어 속을 빼내어 반찬을 만들고, 그 달걀 안에 조금 불린 쌀을 반쯤 담아 밥이나 소죽을 끓인 후 그 숯불 위에 달걀을 얹어 익혀 주셨다. 그 달걀밥은 평소 먹는 밥과는 달리 꼬들꼬들하고 매우 고소해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달걀밥은 손도 많이 가고 세심한 정성이 필요했다. 그래도 각별히 나를 아껴주시던 할머니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귀찮은 내색 없이 웃으시면서 만들어 주셨다.

달걀밥뿐이 아니었다. 내가 도랑에서 고무신으로 미꾸라지를 몇 마리 잡아오면 할머니는 옹기 뚜껑이나 바가지에 담아 그 위에 소금을 뿌려 흙을 뱉어내게 하셨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미꾸라지를 호박잎에 싼 후, 불에 구워 나에게 먹으라고 주셨다. 불에 구운 미꾸라지는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맛이 최고였다. 이 밖에도 할머니는 애호박, 가지, 감, 무 등 재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김치를 담그셨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할머니는 화단에 잎이 넓은 손바닥선인장을 항상 키우셨다. 아이들이 부스럼이나 뾰루지가 나면 그 자리에 이 선인장의 가시를 떼어내고 반을 쪼개서 진을 내어 발라 주셨다. 그러면 상처가 덧나지 않고 쉽게 아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민간요법이 어린아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 주는 생활 속에 살아 있는 교육이자 지혜가 아닌가 싶다.

어릴 적 우리 집 앞마당에는 성당채인 큰 공소가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음식을 잘 만드셨던 할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뿐만 아니라 왜관에서 신부님이 성사(聖事)를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잠자리와 함께 정성을 다해 음식을 대접하셨다. 신부님은 외국인이었지만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너무나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음식만 잘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너무 고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아끼지 않고 도움을 주셨다. 한 마디로 성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착한 분이셨다.

할머니와 함께 어릴 적 내 가슴을 채워 주셨던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일본 나고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셨다. 일제강점기였던 이때 법대를 나온 사람 대다수는 일본인 밑에서 관리나 법조인으로 생활했다. 이런 것이 싫었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와 함께 공소 일을 열심히 하시며 평범한 농부로 지내셨다. 할아버지도 할머니 못지않게 신앙심이 투철했고 항상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사셨다.

한학을 공부해 지식이 출중하시면서 붓글씨를 잘쓰셨던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생골, 마월동, 용암 등 성주군 내에 사는 우리 주(朱)씨 문중에 혼사나 장례 등 큰일이 있을 때면 한문으로 멋지게 글을 써주셨다. 또한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일가들에게는 소작이라도 할 수 있도록 농토를 마련해 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셨다. 이렇게 베풂의 삶을 사셨던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천주님을 믿으라."고 적극 선교를 하셨다. 할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있던 이웃과 일가들은 할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고 손재주도 뛰어나셨다. 우리 집 바깥마당 큰 나무 아래에는 한여름에 더위도 식히고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나와 쉴 수 있는 널찍한 평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보통 부채보다는 두세 배나 큰 대나무 부채를 직접 만들어 앞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는 한시를 써서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하셨다. 할아버지가 그려 준 부채 그림 중에 호랑나비 두 마리가 꽃 위에 앉으려고 날갯짓을 하는 것이 있었다. 앉을 듯 말 듯 날개를 펴고 꽃 위를 나는 모습이 정말로 살아 있는 호랑나비처럼 생동감이 있어 그 부채를 받은 사람들과 이웃집 할머니는 아까워서 제대로 사용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부채를 선물 받은 많은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좋아하며 가보처럼 보관했다.

지금은 모두 내 곁을 떠나셨다. 그러나 진달래와 찔레꽃이 필 때면 나는 어릴 적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고향 산천을 뛰어다니며 그리운 사람들을 가슴으로 만나고 있다.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되새기는 것이며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소망이기도 하다. 이 근원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바람소리, 뻐꾸기 소리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장 수채화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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